김환기의 달항아리와 조선의 흙그릇,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나누는 비밀스러운 대화

2025-08-29 19:16
 흙에서 태어난 두 개의 그릇이 한국적 미의 정수를 논한다. 깊은 밤처럼 어둠을 빨아들이는 흑자편호(黑磁扁壺)는 묵묵한 대지를, 그 위로 떠오른 김환기의 그림 속 백자대호(白磁大壺)는 둥근 달처럼 은은한 빛을 발한다. 비움과 충만, 빛과 어둠. 이 상반된 아름다움의 조화는 '한국적 미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된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열리는 그룹전 ‘흙으로부터’는 바로 이 근원적인 물질, '흙'을 통해 우리 미학의 깊이를 탐구하는 자리다. 전시는 조선시대 도자기로부터 시작해, 시대를 초월하여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등 7팀의 작가들이 흙을 매개로 펼쳐낸 다채로운 예술 세계를 조명한다. 특히 세계 미술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키아프리즈' 기간에 맞춰 우리 미학의 깊이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다. 신리사 학고재 학예실장은 "한국성에 대한 단일한 답을 내리기보다, 흙을 통해 우리가 지닌 고유한 감성과 상상력을 확장하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전통 한옥인 본관은 김환기를 비롯한 원로 작가들의 작품을 조선 도자와 함께 배치해 깊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친 질감으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표현한 박영하의 '내일의 너' 옆에는 회색 태토 위에 백토를 입힌 분청사기가 놓여 소박하면서도 원시적인 미학적 공명을 이룬다. 술의 정취를 노래하되 절제의 미덕을 새긴 '표형문자입주병' 주변으로는 시대를 관통하는 '기호'들이 펼쳐진다. 김환기의 그림에서는 한글 자음과 모음을 닮은 추상 기호들이 떠오르고, 이진용의 대형 설치작 '컨티뉴엄'은 수천 개의 활자가 모여 거대한 문양을 이루며 작은 입자가 세상을 이루는 장관을 연출한다.

 

반면, 신관은 1980년대생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이고 관념적인 접근이 돋보인다. 선배 세대가 흙을 직접적이고 서정적으로 다뤘다면, 이들은 흙이 품은 '개념'에 주목한다. 박광수는 강렬한 색채의 충돌로 하늘과 땅,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흐려진 세계를 표현하며 흙을 모든 존재가 발 딛는 근원으로 삼는다. 듀오 작가 로와정은 '무(無)'의 철학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유쾌한 질문을 던진다. 거대한 벽에 박힌 작은 나사못 하나가 작품의 전부인데, 이 나사가 완성하는 수식 '3+1x2÷2-4'의 답은 허무하게도 '0'이다. 지근욱에게 흙은 우주를 구성하는 입자다. 색연필로 무수히 그은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그의 추상화는 중력에서 풀려난 입자가 빛으로 거듭나는 우주적 순간을 포착한다. 전시는 9월 13일까지 계속된다.